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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윤종헌선교사 일본사역(러브재팬) &gt; 설교&amp;amp;칼럼 &gt; 설교자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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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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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 8:1-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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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시는 하나님(신 8:1-4) <BR><BR>2011.6.20. 일본 재일한국기독교교회 연합회(ACC) 회원 교회 방문시 설교한 내용입니다. <BR><SPAN style="LETTER-SPACING: -1pt; FONT-FAMILY: 맑은 고딕; BACKGROUND: #ffffff; mso-ascii-font-family: 맑은 고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 lang=EN-US><BR><BR>---------<BR>전문설교 첨부파일 pdf파일</SPAN><!-- 테러 태그 방지용 -->]]></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Sat, 23 Jul 2011 13:20: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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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엡 6:21-2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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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거룩한 교회"

본문: 에베소서 6:21~24, 사도행전 20:24, 31~35  


오늘은 제가 담임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설교하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의 마지막 주일 설교를 에베소서 강해로 마무리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에베소서 편지의 대상인 에베소 교회야 말로 
제가 가장 벤치마킹하고 싶어 했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초의 미국에서의 신학교 시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라는 과목을 
선택하며 두 서신서를 비교 연구하라는 숙제를 하다가 교회의 영광을 깨닫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를 깨우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성경 특히 복음서가 제공하는 명백한 대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그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왜 구원받은 성도(거룩한 무리)들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살아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거룩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교회의 존재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강해를 마무리하며 
거룩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자 합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지구촌 교회의 미래 방향과도 관련된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구촌 교회의 리더의 자리를 
떠나면서 제가 여전히 기대하는 미래의 지구촌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에베소 교회에서 찾기로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 에베소 교회의 리더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
(밀레도 항구)에서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의 제3차 전도여행중 
가장 긴 기간인 3년 동안을 에베소에 머물며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가 떠난 후에라도 그가 기대하는 교회상을 사도행전 19-20장에서 
피력한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마지막 결말 부분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거룩한 교회의 비전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거룩한 교회는 은혜의 복음을 성실하게 증언하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의 귀로에서 밀레도 항구에 도착하여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그리로 오게 합니다. 

행20:17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3년간의 에베소 목회를 수행하였는가를 고백합니다. 

행20:24의 말씀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일생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그리고 그 복음에 근거한 복음적 교회를 형성하는 일, 
그것이 바울의 유일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감히 그것은 또한 성역 40년, 
그리고 지구촌 목회 17년의 저의 사명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 자신의 어떤 행함으로도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다는 것,
<오직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순도 100의 복음, 
이 복음만이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인 것을 증거 해 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엡2:8에서 바울이 증거 한 핵심적인 복음의 진리가 아니었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교회의 리더십이 바뀌면 
리더십의 체질에 따른 자연스런 여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지구촌 교우들이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지혜를 발휘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 예배의 스타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찬양의 스타일도, 회의의 방법도 바뀔 수 있습니다. 
젊은 리더십에 따른 젊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만은 변화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한 교회 내에 새 리더십이 세워질 때 
새 담임 목사가 원로 목사에 대하여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간섭하는 것입니다. 제가 간섭할 것 같습니까? 
간섭 안 할 것 같습니까? 
두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할 수 있는 한 간섭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간섭할 일이 생긴다면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복음을 포기하면 교회의 존재이유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1:8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거룩한 교회는 은혜의 복음에 성실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복음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구촌 교회가 영원토록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복음적인 교회로 이 땅에 존재하기를 기대합니다.


2. 거룩한 교회는 건강한 자기 절제로 나눔을 실현하는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3년 동안 에베소 교회 내에서 가르쳐 왔다고 증언합니다. 
행20:35을 읽어 보십시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는 교회라고 
강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자요 지도자인 
자기 자신이 그런 삶의 모습을 실천함으로 물욕으로부터 
자유한 교회상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선행하는 행20:33-34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절제하고 이웃을 위해서는 
나눔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재정을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이런 교회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께 드린 이 헌금이 두려운 돈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탕으로 단 한푼의 낭비 없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깨끗한 재정의 청지기로 살아오고자 
애써왔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섭게 양적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에 
이런 성장이 목회자 자신의 왕국의 성장으로 비치는 오해가 없도록 
지구촌 교회를 다른 목회자 보다 조금 빨리 만65세에 조기 은퇴할 것과 
지구촌 교회를 떠나는 날 어떤 경제적 이득이 없이 떠나겠다는 것을 
약속해 왔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중형 교회이상 대형교회를 목회하면 
소위 은퇴비의 명목으로 10억에서 30억을 받고 주택을 목회자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사역을 마무리하며 
그런 보상을 받는 것이 반드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만약에 단 한 사람의 교우라도 제가 이런 보상을 받음으로 
마치 돈을 위해 목회를 한 것처럼 비추이는 것은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은퇴하며 저는 약속대로 한푼의 경제적 이득이 없이 물러갑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서 귀국할 때 몇몇 분들이 
기흥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 사택으로 구입해 주신 것인지 개인의 주택으로 
주신 것인지 확실치 않아 고민하다가 수년전 선교사님들이 사용할 
주택으로 교회에 헌납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개척할 때와 마찬가지 모습의 빈손의 청지기로 물러갑니다. 
어쩌면 이런 약속의 이행은 지금까지 제가 해온 어떤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마지막 설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전에 결산을 해보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실제적으로 전체 예산의 37%를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 교회로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로 우리 교회는 분당 노인 복지관 운영을 수탁함으로 
10여개에 달하는 사회복지 기관을 통해서 이웃과 지역을 
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강조한 그대로 
이제 우리 교회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이웃과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제 자신이 지구촌 교회 목회의 결과로 어떤 경제적 보상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기쁘고 보람된 일임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건강한 자기 절제로 나눔을 실현하는 교회, 
이것은 이제 이상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현주소임을 고백하며 
저는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물러납니다.


3. 거룩한 교회는 거룩한 헌신으로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 특별한 
한 사람의 인물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두기고라는 사람입니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우리 사정을 너희에게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두기고는 다름 아닌 바울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로마에서 에베소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두기고 때문에 에베소서가 쓰여지고 보존된 것입니다.
(골로새서도) 그는 설교한 사람도 굉장한 재정적 헌신을 
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시간을 내어 편지 전달과 같은 일상적인 
심부름을 감당한 바울의 동역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두기고 같은 이름없는 동역자들의 헌신 때문에 
에베소 교회가 태어나고 위로받고 격려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의 행19:10과 같은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두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 사도는 두기고 같은 동역자들의 헌신 
때문에 안심하고 말씀 사역에 집중했고 그 결과는 온 소아시아 
전체에 복음적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가 사모했던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지구촌 교회 담임 목사직을 물러나며 
저의 부족함을 덮어주며 저와 함께 헌신했던 수많은 지구촌 교회내의 
두기고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제가 주일마다 말씀을 증거하는 동안 여러 교우들이 불편 없이 
주차하도록 때로는 무지한 교인들의 욕을 먹으면서 주차 봉사를 해온 
모든 성도들, 여러분은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셀 교회 철학을 따라 신실한 영혼의 돌봄이와 지킴이로 
목장 교회를 매주 마다 변함없는 헌신으로 목장을 지켜온 
모든 목자와 마을장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저의 두기고였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주일마다 우리 교회와 민족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해온 모든 교육 목자들, 여러분이 또한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매주 본당과 여러 채플의 안내봉사자로 새 교우 영접실의 안내자로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 또한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선교팀의 봉사자로 선교의 자리를 신실하게 
지켜준 모든 봉사자들 여러분이 또한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예배 인도자와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신 모든 중보 기도자들이 또한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와 시설행정스태프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준 여러분들 그리고 나의 목회를 보좌해주신 
모든 신실한 목회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바로 저의 두기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일 마다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할 때마다 
아멘으로 말씀을 받아 주시고 지지해주신 여러분, 
여러분을 볼 때마다 저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보람을 느꼈고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무언의 격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지구촌 교회도 저의 명예로운 은퇴도 있을 수 없 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저의 두기고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 사랑과 격려를 저의 후임 진재혁 목사님에게 주셔서 
우리 교회가 건강한 좋은 교회로 만족하지 않고 더 위대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억해 주십시오. 
계속되는 거룩한 헌신만이 계속하여 거룩한 영향을 남기는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동원목사 
]]></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Mon, 10 Jan 2011 16:39: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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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왕하 21:1-9</title>
<link>http://lovejapan12.ijesus.net/bbs/board.php?bo_table=z5_1&amp;wr_id=10</link>
<description><![CDATA["므낫세와 같은 삶을 경계하자"<BR><BR>므낫세는 12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전697년부터 55년간 다스렸습니다. 초기 10년 정도는 부왕과 공동 통치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45년 정도 됩니다. 므낫세는 부왕 히스기야의 정책을 전면 부정하면서 영적으로 크게 부패했습니다. 먼저 부왕이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단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3절). 그리고 성전 안과 뜰에다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세웠습니다(4-5절). 뿐만 아니라 몰렉에게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를 지나게 하며 점치고 사술을 행했습니다(6절). 심지어 므낫세의 죄는 북쪽 이스라엘의 죄 또는 아합의 죄와 비교되기도 합니다(3절). 지금까지 부왕 히스기야의 개혁은 완전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므낫세의 통치는 유다를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손자인 요시야가 등장해서 또다시 개혁을 단행했지만 멸망으로 치닫는 유다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쉽습니다. 부왕 히스기야가 평생을 바쳐 이스라엘 공동체를 개혁했습니다. 종교, 정치, 사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을 다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므낫세는 부왕이 쌓은 것을 일순간에 다 무너뜨렸습니다. <BR><BR>므낫세가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심각한 악정을 일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BR>첫 번째는 삶의 모델을 잘못 설정했습니다. 삶의 지표로 삼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갔습니다. 온갖 우상들을 성전 안팎에 세워 경배하며 섬겼습니다. <BR><BR><BR>두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이방나라(앗수르)를 지나치게 의지하고 의식했습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므낫세는 유다가 패망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따르고 누구를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까?]]></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Thu, 19 Aug 2010 09:00:54 +0900</dc:date>
</item>
<item>
<title>행 17:28</title>
<link>http://lovejapan12.ijesus.net/bbs/board.php?bo_table=z5_1&amp;wr_id=9</link>
<description><![CDATA[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지식의 근본

교리사에 남을 명구절로 시작…참 경건 없는 곳에 참 지식은 없다

'제1강좌' 생명의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기독교 강요 1.1.1-1.5.15) 

1. 오직 하나님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지혜, 말하자면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1.1.1). 

초판 이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교리사에 있어서 가장 명구(名句)라고 할 만한 본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사랑(fatherly love)을 베푸셔서 천지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운행하시는 섭리를 포함한다.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류의 타락 이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베푸신 긍휼과 자비를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우리 모습의 연약함으로 그 분의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신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뜻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매사에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에 있어서도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타락 전의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순수하게 보존함으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그 위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받은 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전락(顚落)하여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인류에게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셨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낮아져서 그 분을 묵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1.1.2).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표준”이 되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다. 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은 인성의 고귀함이나 심오함을 내세워 스스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때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설파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지식에 있어서조차 진리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전반부).  


2.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을 영화롭게 함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함께 역사하므로 참 경건(true godliness, pietas vera)이 없는 곳에 참 지식(true knowledge, notitia vera)도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은혜를 깨달아 그 분의 사랑을 감사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로부터 내려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위로는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이 곧 경건이다(1.2.2).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으로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sense of divinity, 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ed of religion, 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ce, conscientia)”을 각각의 영혼에 부여 받았다. 이러한 은혜는 타락한 인류에게도 계속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불씨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조차 물을 부어서 꺼뜨리는 삶을 살고 종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든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의 고삐”에 매인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마주 보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다(3.1.1; 4.1.1, 4). 

그러므로 순서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나 참 지식을 얻음에 있어서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다. 먼저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음으로써 아는 것이 경건한 지식의 출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분께서 계신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적합하고 마땅한지를 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지를 안다”(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에게 유익하다 함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거룩한 지식은 곧 우리에게 유익함이 된다. 우리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데 있음이 자명할진대(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우리의 지식도 참으로 그러하다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스스로 아시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대로 안다. 모든 피조물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되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얻었다. 피조물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알려짐으로써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안다고 하는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이나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흄과 같은 회의주의자들과 칸트와 같은 불가지론자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알되,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시므로, 곧 알려짐으로써 안다. 

피조물의 본래적 특성은 하나님에의 의존성에 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 하나님께서 아신 바대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만한 지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피조성(被造性)과 하나님의 형상성(形象性)이 동시에 있다. 우리는 알되, 오직 알려짐으로써 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Coram Deo) 내어 놓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서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참 평강이 없어진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신 바 된 그 지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도록 하자. 오직 그 지식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참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모든 피조물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훈장”으로서, “거울”로서 하나님을 찬미한다(1.5.1,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인류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표본”으로 지으셨다. 인류는 하나님 영광의 최고의 도구이다. 젖 먹는 어린 아이의 말 없는 웅변은 모든 피조물의 찬미를 압도한다(1.5.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화려한 미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셨다”(1.14.20). 그리하여서 영광의 극장의 최고 배우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헛된 사색을 멈추고 그 분이 하신 일을 목도하며 찬미로 나아가자! “그 분을 찾기 위하여 꼼꼼히 따지기보다 그 분을 더욱 경배하도록 하자!”(1.5.9).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후반). 
 

기독신문 발췌 ]]></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Sat, 30 May 2009 10:04: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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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시 62:1-5</title>
<link>http://lovejapan12.ijesus.net/bbs/board.php?bo_table=z5_1&amp;wr_id=8</link>
<description><![CDATA[오직&nbsp; 주만 바라보자!(시 62:1-5)<br/><br/>"[1]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br/><br/>금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해를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었음을 생각합니다.&nbsp; 그래서 자꾸만 마음과 몸이 옴추려 질려고 합니다.<br/><br/>그런데 이러한 우리들의 고민은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과 같이 다윗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라티 같이 되었지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까?<br/><br/>첫째로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1절 하)<br/>다윗은 참으로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다윗을 구원해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붙잡아 주시고 위경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nbsp; 그러기에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만이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br/><br/>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사람들을 더 의지하려고 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오는 실망감과 상실감 그리고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종이 일본에 선교하러 온지 3년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상실감과 상처를 받은 것은 사역에서 왔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도움을 받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일본에서의 사역을 돌아볼 때에 이 모든 것들이 저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r/><br/>이러한 시행착오는 다윗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없었고, 하나님만이 자신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br/><br/>둘째로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신다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2절)<br/>다윗이 본문 2절에서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분은 주님만에 없었다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br/><br/>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실 뿐만 아니라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확실하여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피할 때마다 새로운 힘과 용기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도 본문 2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크게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br/><br/>이제 바라기는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큰 힘과 은혜를 공급받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함으로 다윗과 같이 크게 요동치 않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br/><br/>셋째로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소망이 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5절)<br/>본문 5절에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언제나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이 소망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br/><br/>소망이 없는 자는 방황할 수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nbsp; 특히 본문 4절에서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원수들이 다윗이 넘어지고 스러지기만을 고대하고 있고, 거짓말로 일삼고, 입으로는 축복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저주를 일삼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br/><br/>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크게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소망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br/><br/>이제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품고 2009년 새해를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br/><br/>비록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고개조차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의 주가 되시고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br/><br/>비록 지금은 고독하고 정말 힘들고 어렵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을 비롯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아퍼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새로운 힘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등을 보이시지 않으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2009년을 열어 봅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듭니다. (아멘)]]></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Tue, 30 Dec 2008 19:40:2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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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눅 9:46~50</title>
<link>http://lovejapan12.ijesus.net/bbs/board.php?bo_table=z5_1&amp;wr_id=5</link>
<description><![CDATA[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눅 9:46~50)&nbsp; <br/>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nbsp; <br/>&nbsp; &nbsp;  <br/>2006년 한 대기업의 대리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를 설문조사 했다. 그 결과 첫 번째는 업무량이나 실적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조직 내 인간관계 갈등’이었다. 어디 그것이 직장에서 뿐이겠는가?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사람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곳에서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바른 신앙은 인간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관계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요구된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이 부분에 교훈을 얻도록 하자. <br/><br/>첫째로, 작은 자를 귀하게 보는 눈이다. <br/><br/>“누가 크냐”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이것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누가 더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느냐? 누가 더 지도자로 인정을 받는가? 이것이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크다고 여겨지는 자는 환영 받고 따르는 자도 많다. <br/><br/>제자들에게도 항상 이런 긴장이 있었다. “우리 중에 누가 크냐” 그리고 이런 시각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자기 곁에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이가 가장 큰 자라고 가르치신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세상의 잣대와는 전혀 다른 잣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br/>이 시각의 변화야말로 평화의 열쇠다. 소위 겉으로 드러나는 힘과 권력을 좇아 움직이는 해바라기들이 모인 곳에서는 평화가 어렵다. 경쟁과 질시, 분열과 다툼, 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한다. 이것을 치유하는 길은 예수님의 눈을 갖는 것이다. <br/><br/>예수회 사제면서 예일대와 하버드대 교수였던 헨리 나우만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라르쉬공동체의 목회자로 갔다. 그가 만난 이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살수 없는 중증지체장애인인 아담이었다. 이 둘 중 누가 선생이고, 누가 큰 자인가? 참 ‘뻔한’ 질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뻔하게 여겨지는 보편적인 사고의 틀을 깼을 때, 나우만은 놀라운 내적 치유와 변화를 경험했다. <br/><br/>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 나보다 가진 것과 배운 것이 적은 사람, 나보다 어리고, 미숙하고 연약한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데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이 마법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평화가 있고, 진정한 섬김의 사랑이 넘칠 것이다. <br/><br/>둘째로,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br/><br/>루 윌리스가 쓴 벤허를 보면, 유다의 귀족 벤허와 그의 소꿉친구면서 총독의 사령관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온 멧살라가 감격적으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는 무리를 색출하고자 했던 멧살라는 벤허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자신의 친구로서 로마의 편에 서서 반역도 색출을 협조하든지, 아니면 적이 되든지 중간지대는 없다. 멧살라는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 이분법화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br/><br/>요한이 바로 그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당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뒤를 좇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따르지 않음을 인해서 이것을 금하였다. 요한의 시각은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은 내 편이 될 수 없다는 시각이었다. <br/><br/>우리는 이처럼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조금이라도 내편이 되어주거나 나와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런 시각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등을 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과 끼리끼리 어울리는 습성을 갖게 되고 이것은 공동체내에서 분열과 분쟁을 야기하기 쉽다. <br/><br/>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요한과 정반대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절) 예수님의 시각은 나를 대놓고 대적하지 않는 사람은 다 나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nbsp; <br/><br/>어떤가? 이 예수님의 시각을 가져보자! 그러면 내 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단 40%만 생각이 맞아도 다 나를 위하는 자이다. 내 편이다. 나와 기질과 생각이 많이 다른 사람도 따지고 보면 다 내 편이다. 교회 안에서 내편이 아닌 자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몇 퍼센트 다르겠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의 안경을 쓴다면 교회에 다툼과 분쟁이 생길 이유가 없다. 꽁한 마음으로 원수시하고 내 삶에서 몰아내고 내어 쫓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br/><br/>그렇다. 우리 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 게다기 극한 이념의 갈등으로 이리저리 나눠지고 갈라지고 있다. 함께 할 수 없는 적이 많은 사회이다. <br/><br/>먼저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마음을 넓히자! 요한의 안경을 벗고 예수님의 안경을 쓰자! 그래서 먼저 교회에서부터 참 평화의 공동체를 실현하자.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를 평화의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자들이 되자.]]></description>
<dc:creator>러브재팬</dc:creator>
<dc:date>Mon, 08 Dec 2008 18:29: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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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 26:69-75</title>
<link>http://lovejapan12.ijesus.net/bbs/board.php?bo_table=z5_1&amp;wr_id=4</link>
<description><![CDATA[마태복음 26장 69~75절 <br/><br/>남몰래 흘리는 눈물<br/><br/><br/>1. 서론<br/><br/>지난 2007년 9월 6일에 71세로 유명을 달리한 세계적 테너 가수, 하늘이 준 음성으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일찍이 불렀던 &#039;도니제티&#039;의 오페라 &#039;사랑의 묘약&#039; 중에 나오는 아리아, &#039;남몰래 흘리는 눈물&#039;(Una furtiva lagrima)이란 독창곡이 있습니다. &#039;사랑의 묘약&#039;은 19세기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대농장주의 딸 아디나, 그녀를 사랑하는 소박한 시골 청년 네모리노 그리고 밸코레 하사관 등, 세 사람을 둘러싼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br/><br/>아디나는 네모리노에게 실망하여 벨코레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떠돌이 약장수 돌카마라에게서 사랑의 묘약으로 알고, 포도주를 사 마십니다.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사는 일, 그 약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벨코레에게 입대하겠다는 계약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아디나는 자신에 대한 네모리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며 눈물을 짓습니다. 약삭빠른 둘카마라는 그녀에게도 약을 팔려고 하지만, 아디나는 자기 힘으로 그의 사랑을 차지해보겠다고 거절합니다. <br/><br/>숨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네모리노는 아디나도 자기를 사랑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기쁨과 감동을 노래합니다. 바로 남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그 유명한 아리아, &#039;남몰래 흘리는 눈물&#039;(Una furtiva lagrima)입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흘렀소. 유쾌한 젊은이들이 질투하는 듯해요"로 시작되는 가사입니다. <br/><br/>2. 본론<br/><br/>차원은 다르지만, &#039;남 몰래 흘리는 눈물&#039; 중에는 고난의 언덕을 홀로 헤치고 오르기가 지쳐서 홀로 우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자기 비애 때문에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요셉이 사랑하는 친 동생 베냐민을 보고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남모르게 흘린 눈물도 있습니다.(창 43:30) <br/><br/>그러나 본문 말씀의 베드로의 눈물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밖으로 나가서 &#039;남 몰래 흘리는 회개의 눈물&#039;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남 몰래 운 경위를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소명했을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날 때, 주님은 고독에 젖었습니다. 당신 자신의 동족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시기하여 올무를 놓아 예수님을 죽일 첫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현혹되어 주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039;세상의 기독관&#039;을 물어보자, 위대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흐뭇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br/><br/>심지어 베드로는 강경한 표현까지 써서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저는 감옥에라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의 약속을 굳게 다짐한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다 넘어가고 다 굴복 당하고 다 변절하고 다 배신한다 해도, 오직 베드로만은 끝가지 버티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세인들이 기대를 걸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베드로야말로 살아있는 양심이다", "굽힐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다", "무릎을 꿇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으리라"고 말했던 반석같이 믿음직하고 굳센 베드로였습니다. <br/><br/>그런데 왜 베드로는 쉽게 변절했을까요? 이 점은 베드로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서의 문맥에서 생각해봅니다. 비록 순간적인 변절이요 불가항력적인 힘에 눌려 그랬다지만, &#039;베드로 자신에게는 마음의 갈등과 투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을까&#039; 하는 생각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하고 싶어 한 일이 아니고, 쫓기고 눌리고 강요당한 심리적·정신적 압박감에서 행한 변절이요 배신인 줄 알게 될 때, 그런 내적 충격과 갈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추측할 수 있겠는가를 상상해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 중에 베드로와 같지 않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지 각자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br/><br/>그러니 베드로는 주님을 &#039;멀찍이&#039; 거리를 두고 도망갈 자세로 그 결과를 보려고 갔는데 유대 지도자들이 &#039;사형&#039;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누구라도 그 장면에서 예수의 제자라고 큰소리칠 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오히려 주님께는 변절이지만, 베드로 그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않았습니까. 엉거주춤하게 굴지는 않았으니 회색분자는 아니잖습니까? 일찍이 주님께서 "예", "아니오" 하라고 하셨으니 그래도 베드로는 "아니오"를 분명히 했습니다. <br/><br/>심히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<br/><br/>베드로는 처음부터 현실주의자가 되어 가야바에게 매수당하고 처음부터 빌라도 권력에 타협하여 반역자가 된 &#039;가룟 유다&#039;보다는, 훨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요 이상과 현실, 원리와 실제라는 두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 &#039;우리들 각자는 어떠했을까?&#039;가 더 중요합니다. <br/><br/>베드로의 본 모습은 변절한 것보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痛哭)하니라." 베드로의 진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미 쏟아진 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깨닫고 통곡한 눈물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어 그 땅을 적시고, 그가 약하여 배신한 그 역사의 하늘에서 눈물의 소나기를 쏟습니다. <br/><br/>자신의 수치를 골수에서부터 아파하는 그 회한의 눈물, 후환이 두려워 강경히 부정했던 자신이 비굴한 현실주의가 되고 말았음을 솔직히 긍정한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분위기에 영합한 회개가 아닙니다. 홀로 주님만 상대한 남몰래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분명히 눈물 이상의 짙은 액체(液體)였습니다. 뛰는 심장에 고동으로 생긴 안구의 출혈이 밖으로 쏟아진 피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남에게 보여주기가 싫고, 주님의 전지(全知)와 사랑에 쫓겨서(눅 22:61), 혼자 마음껏 울 수 있는 회개의 장소를 택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어두움 속에서 터뜨린 통곡, 목이 메여 울고 또 운 오열, 사나이 대장부의 비장한 각오와 외로운 울음이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일당이다. 나도 잡아가라"고 대들지 못한 &#039;비겁함&#039;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br/><br/>닭은 새벽을 알리려 울었지만, 베드로 그 자신은 자신 속에 이미 만들어진 어두움을 슬퍼해 동물보다 못한 자신을 통탄해 또 한번 크게 울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말미암아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져 멸망으로 줄달음 친 죄악의 깊이를 바라 본 격분, 이것이 베드로의 남모른 통곡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회개(悔改)이었기에 이 울음은 위대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br/><br/>베드로의 고독한 통곡이 너무나 진실했기에 그의 변절의 과오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인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했고, 그는 주님을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비록 멍든 심장을 가졌으나, 그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로 생각하고, 초대 교회 군중 앞에 서서 예수의 증인 노릇을 했을 때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를 시켰던 것입니다. <br/><br/>은밀한 회개가 없는 한국교회<br/><br/>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내, 십자가 밑에서 &#039;주여, 주여&#039; 가증한 목소리로 기도드리는 무리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진면목이 빛난 것은 자기를 똑바로 본 깨달음입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뉘우침! 이것처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은 &#039;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던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039;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새벽닭은 우는데, 고독한 통곡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부끄러워야 혼자 남 몰래 골방기도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br/><br/>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셨고,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와 선행은 은밀하게 숨어서 남모르게 오직 하나님만 대상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039;기독교의 본질 대신에 비본질적인 것&#039;으로 대치했기에 야기된 문제입니다. 질적인 영혼의 문제, 즉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인 세속적 물량주의가 한국교회의 정체성(Identit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br/><br/>지난날의 한국교회는 새벽제단마다 양떼들 때문에 아파하는 목자의 눈물 자국이 있었고 성도들은 사랑하는 목자를 위해서 눈물 뿌린 골방의 기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교계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 은밀한 기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본질적 요소가 살아져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본래적인 교회 모습으로 되돌아 가야합니다. <br/><br/>3. 결론 <br/><br/>자, 끝맺음을 합시다. 이제 저는 그 후 감옥에도 즐겨 갇혔던 베드로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비록 &#039;쿼바디스&#039;의 실수를 또 한번 저지를 수 있었다고 해도, 그의 배신은 그의 고독한 &#039;통곡&#039;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 교회 역사를 그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황송한 것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의 장엄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롬 6:20)는 말씀은 이런 외로운 통곡을 전제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br/><br/>아, 변절한 베드로여! 분위기에 휩싸인 회개가 아니라, 홀로 마음껏 통곡한 베드로여! 실패의 쓴잔이었기에 회한을 통한 환희의 축배를 들었고, 위대한 소명감에 재귀한 당신, 죽기까지 스승의 증인으로 살다 간 당신이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보낸 당신의 일생 찬연하여라. 새벽닭 울 때마다 당신 생각에 눈물 적시는, 여기 동방의 아침 햇살이 빛나는 나라. 당신의 참회와 그 눈물, 가을비에 묻혀 무딜 대로 무딘 우리 가슴에, 길이 촉촉이 뿌려주소서! <br/><br/>양견/ 산하(山下)목회연구소 소장·목사]]></description>
<dc:creator>재팬사랑</dc:creator>
<dc:date>Mon, 01 Dec 2008 14:16:2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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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시 95:1-1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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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께 무릎을 꿇자”(시 95:1-11) <br/><br/>&nbsp; <br/>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65378;예배(禮拜)&#65379;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라는 특별한 초대장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서에서 인용된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시95:7절, 히4:7)&nbsp; <br/><br/>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로 초청하시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유효(有效)할 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유효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nbsp;  <br/><br/>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과거뿐 아니라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광야에서 불순종하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 28:45과 47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br/><br/>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광야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자주 불평했고 투덜거렸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최종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울의 경우를 통해 부분적인 순종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nbsp; <br/><br/>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폐지가 되거나 폐기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을 좇아서 살 것이라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순종의 영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nbsp; <br/><br/>▶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nbsp; <br/><br/>우리가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은 아닙니다. 롬 1장 23절에서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아무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서 온전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nbsp; <br/><br/>뿐만 아니라 너무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아굴이 잠언 30장 9절 상반 절에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의 부요한 자뿐만 아니라 물질에도 부요한 자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보통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물질을 더 가까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nbsp; 우리가 왜 하나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까?&nbsp;  <br/><br/>1. 여호와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nbsp; <br/>본문 1절 말씀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반석”이란 말씀은&nbsp; "피난처"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nbsp; <br/>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되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nbsp; <br/><br/>또한 여기의“즐거이 부르자”라는 말씀은 “소리로 귀가 먹게 하다, 놀라거나 기뻐서 소리치다, 나팔 소리를 내다”라는 뜻으로 고대의 왕들이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할 때에 찬양대와 악대가 큰 소리로 노래할 때에 사용된 말입니다.&nbsp;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하되 아주 웅장하고 거룩하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는 성도는 찬송할 때에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가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우리가 왜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br/><br/>▶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br/>본문 2절에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즐겁게 찬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감사의 찬양이 넘쳐야 합니다. 찬양을 하되 즐겁고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nbsp; <br/>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치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되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nbsp; <br/><br/>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느 8:10 하반 절에서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기쁨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때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사울에게 악신이 물러갔던 것처럼 찬양은 정말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nbsp;  <br/><br/>2.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입니다.&nbsp; <br/>본문 3절에서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비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다른 신의 존재와 대조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위에는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nbsp; <br/>다만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사람도 신격화시키고 금수도 우상화하고 심지어는 버러지 형상도 신으로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nbsp; <br/>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믿지 못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복잡하게 사변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철학적(哲學的), 문학적(文學的) 심지어 신학적으로 접근해도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온전히 믿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br/><br/>그렇다면 크신 하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br/>본문 4절부터 5절에서&nbsp; “[4]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nbsp; <br/>거인 같은 산봉우리와 웅장한 기암괴석(奇巖怪石)과 깎아지른 절벽과 뛰쳐나온 돌산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대서양, 태평양, 지중해, 북극해 등과 같은 거대한 대양을 비롯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뻗어있는 강과 하천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망망대해에 솟아있는 섬과 대평원과 고원 지대와 울퉁불퉁한 산지와 거대한 산맥 등 육지라 부르는 모든 것 역시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nbsp; <br/>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와 지배권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운명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요 발등상입니다. 조금만 주의해 관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주장에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으로 추론해 본다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br/><br/>그렇습니다. 우연히 세상이 만들어지고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br/>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꼭 기억할 것은 크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나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거민들 가운데서 나를 거룩하고 특별한 소유 곧 보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속하신 것같이, 우리도 주님께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가서 2:16 하반 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나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허리를 굽혀 하나님을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br/><br/>그런데 기억할 것은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다음에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을 지금도 섭리하시며 통치하십니다.&nbsp; <br/><br/>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세상이 진화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65378;창조 진화론&#65379;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또 어떤 자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재자이심을 알지 못하고 나무를 목신으로, 돌을 석신으로, 바다를 해신으로, 산을 산신으로 섬기고 경배합니다. 그 만물을 지으신 자는 보지 못하고 그 만드신 피조물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여 경배합니다. 바로 우상 숭배자요, 영적 간음자입니다.&nbsp; <br/><br/>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nbsp; 오직 여호와만 크신 왕으로 경배하며 그 통치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시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온전히 믿고서 허리를 굽혀 그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합니다. 결코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농담으로 그 말씀을 희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자초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br/><br/>3.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nbsp; <br/>본문 7절에서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의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만약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짐승에 잡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죽습니다.&nbsp;  <br/><br/>그렇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서로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은 목자를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때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nbsp; <br/><br/>목자는 양의 울음을 들을 때에 양의 아픔이나 위험을 알아차립니다. 반면에 양들은 목자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지금이 풀과 물을 먹을 때인지, 아니면 위기가 닥쳐온 때인지, 아니면 목자를 따라 나서야 할 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양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음성을 이해하고 순종합니다.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할 때에는 큰 울음소리로 목자에게 알리듯이 믿음의 백성들도 위기에 처할 때에는 큰 소리로 목자를 불러야 합니다.&nbsp;  <br/><br/>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양이 절도와 강도의 위험에 처할 때에 삯군 목자들은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목숨을 희생하시면서 그 양들을 이리와 사나운 짐승 떼들로부터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예수님은 우리들의 “큰 목자”라고 하셨습니다(벧전 2:25, 히13:20 상) <br/><br/>그렇다면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그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br/>본문 8절-9절에서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한때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귀머거리가 되어갔습니다. 그것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요 10:27 상)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참 양떼가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nbsp; <br/><br/>출17:7절에 보면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맛사"는 "시험 또는 유혹"을, "므리바"는 "다툼 또는 논쟁"을 뜻합니다. 또 "시험하여"라는 말은 "시도하다, 꾀하다, 감히 시험하다"등의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당신의 신실하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반석에서 솟구치는 샘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끊임없이 미혹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패역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물이 없는 곳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자신들 가운데 계신 분인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인지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불신앙과 패역함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사십 년 동안이나 그렇게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nbsp; <br/><br/>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와 맛사에서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는 교만했던 강퍅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온순한 마음을 가지고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그 음성에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결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목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진노하십니다.&nbsp;  <br/><br/>그리고 본문 10절에서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음성을 듣지 않음으로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근심되게 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러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사단에게 미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단에게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결국은 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nbsp; <br/><br/>그래서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40년동안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배회한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외한 나머지 아무도 하나님께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심과 그들은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nbsp; <br/><br/>▶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br/>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4:1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br/><br/>이제 말씀을 맺습니다.&nbsp;  <br/>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십니까? 찬양하십니까? 그런 우리의 삶은 세상에 도전을 줄만합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크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뿐 아니라, 크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br/><br/>순종이란 "나를 책임지고 있는 누군가의 현명한 지시를 기쁜 마음으로 즉시 완벽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독생자를 포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인 아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순종했습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낙타는 주인이 타거나 짐을 실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립니다.&nbsp; <br/><br/>자신을 책임지고 있는 주인의 현명한 지시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히 5:8-9에서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창 7:5에서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遵行)하였다"(창7:5)고 말씀합니다.&nbsp; <br/>어니스트 라킨(Ernest Larkin)은 "온전한 분별력을 위해서는 단련된 마음,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예민함,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순종은 이렇게 중요합니다.&nbsp; <br/><br/>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작은 어려움 앞에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가나안, 곧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까지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description>
<dc:creator>재팬사랑</dc:creator>
<dc:date>Thu, 20 Nov 2008 06:51:1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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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시 103:1-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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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추수감사, "풍요로운 결실에 감사하자" <br/>&nbsp;<br/>&nbsp; <br/>추수감사절의 유래 <br/><br/>&nbsp;<br/>추수감사절은 종교박해를 피하여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 미국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이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에 유래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정착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이미 숨을 거두었다. 설상가상으로 추위와 질병과 인디언의 습격이 계속됐다. 이듬해 봄에는 거의 절반이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밭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첫 번째 수확물로 감격적인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br/><br/>“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와 여러 친구들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첫 열매를 그분께 드린다.” 이것이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었다. 가장 고통스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백성들이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것이다. 감사는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nbsp; <br/><br/>1621년 가을에 플리머쓰(Plymouth) 정착지에서는 경작법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을 초대, 야생 칠면조(turkey)를 잡아 나눠먹었다. 이후 칠면조 요리는 추수감사절의 단골메뉴가 됐고 이날을 ‘터키 데이(turkey day)’로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말 이전에 이 추수감사절은 코네티컷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연례적인 성일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종교적 절기(비록 나중에는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만)가 아니었다. <br/><br/>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관습이 보다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자 각 주의 정치가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각 주의 연례행사로 정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의하게 되었다. <br/><br/>한편 1840년대에 “Godey&#039;s Lady&#039;s Book”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년 9월 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 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br/><br/>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 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 날짜를 확정지어 놓고 있으나 대통령은 계속하여 링컨이 1863년에 시작한 전례에 따라 매년 추수감사절 날짜를 선포해 오고 있다. <br/><br/>한국의 추수감사절 <br/><br/>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그 날짜를 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정하여 장로교 단독으로라도 지키기로 하였다. <br/>&nbsp;<br/>그후 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일(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계 일각에서는 한국농촌의 실정에 맞는 시기인 중추절(추석)을 전후해서 한국교회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를 시행하는 몇몇 교회와 교파도 있다. 그후 수요일을 주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른다. <br/><br/>&nbsp;성경의 추수감사절(초막절) <br/><br/>추수감사절은 메이플라워 이후에 제정된 날로,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날이라고 주장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큰 기쁨을 갖고 지키던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켰으며,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유랑을 상기하면서 계약을 갱신하는 절기가 초막절이었다. 그 절기는 일반적으로 추수가 끝날 즈음이었다(출 4:22). 보통 장막절로도 알려져 있으며(참조 대하 8:13), 초막절의 다른 이름으로 성서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수장절」(출 23:16), 「여호와의 절기」(레 23:39, 삿 21:19)라고도 하였다. <br/><br/>초막절은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밭에서부터 거두어 드릴 때”, 즉 추수기와 연관되어 있었다. 땅의 소산을 풍성한 수확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대대로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었다(레23:34-41).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하였으며, 그 후로(혹은 그 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소산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왔다. <br/><br/>추수감사절을 따로 정한 것은 미국 이주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이 관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또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반카톨릭 성향이 매우 강하여, 크리스마스 절기를 카톨릭의 절기로 간주하여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영국의 식민지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게 되자,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절기 대신에 청교도들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br/><br/>&lt;신성욱 목사&gt;]]></description>
<dc:creator>주님사랑</dc:creator>
<dc:date>Sat, 15 Nov 2008 19:13: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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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눅 11:5-1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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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예수의 비유 설교 <br/>강청기도<br/><br/><br/>(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039; 하시니라(눅 11:5-13, 참조 : 마 7:7-11) <br/><br/><br/>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 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습니다.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페이건에게는 4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 정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만 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의 길을 추진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br/><br/>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고 나니 제자 중 요한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가복음11:1). 이에 예수께서 기도의 모델로 가르쳐주신 기도가 곧 &lt;주기도문&gt;입니다. <br/><br/>"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누가복음 11:1-4) <br/><br/>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방법으로 본문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이 늦었지만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문을 두들겨 이미 곤하게 잠에 떨어진 친구를 깨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남은 밥이 없다며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밥 좀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친구라는 이유로는 네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강청(强請)하기 때문에 일어나 네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의 방법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r/><br/>"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9-13절) <br/><br/>여기서 제시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열심히 끈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고 계십니다."(시34:15)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겠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성령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통달하셔서 우리가 잘못 기도한 것이나 알지 못하여 구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르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시51:11) 간구했던 것입니다. <br/><br/>병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생활이 좀 더 부유해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점점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 부모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했건만 오히려 불화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어찌해서 저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누구 못지 않게 눈물과 정성으로 기도했음에도 기도의 열매가 없어 기도하기를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기도의 목적과 기도의 자세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즐겨 쓰던 농담이 있습니다. 한 주일 학교 어린이가 산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 아이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곰에게 착한 마음을 주세요" 눈을 떠보니까 곰도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야아! 기도가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날줄은 몰랐어!"하고 기뻐하니까 곰이 말했습니다. "너는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몰라도 나는 식사 기도를 한거야." 레이건은 &#039;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039;는 뜻으로 이 농담을 사용하였으나 기도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 곰처럼 식사기도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요구만을 위한 기도라면 얼마나 초라한 기도인가? 기도의 결론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경적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적이 아닌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lt;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gt;라는 TV프로에 나온 어떤 할머니가 6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날마다 새벽기도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 놀음하러 갔을 때도 놀음해서 돈 따서 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세계적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통 사고를 당해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였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싸우며 어떻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lt;퍼레이드, Parade&gt;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의사도 수고하였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쓴잔이 오지 않게 해주소서." 하는 기도보다 "하나님 내가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이같은 기도는 바로 성경적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어야 하며, 기도를 많이 할수록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기도를 깊이 할수록 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이 용서하며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깊이 할수록 더욱 더 생활이 깨끗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면 할수록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욱 더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구원을 위해 선교헌금해야지, 십일조 드려야 하지, 감사헌금 바쳐야 하지, 구제헌금드려야 하지, 이것저것 다 내어주고도 못 다 준것처럼 여기며 몽땅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물질에 대한 것은 오직 일용할 양식밖에 없습니다. <br/><br/>&lt;붙이는 도시락&gt;이 멀지 않아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국방부는 첨단 기술력을 이용해 군용식량(MRE)을 민간회사와 합작생산해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시판할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몸에 붙이기만 하면 인체에 필요한 모든 필수 영양소를 피부를 통해 공급해주는 &lt;패치형&gt;식량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방부 식량프로그램의 제럴드 다쉬 수석 연구원은 "군인들이 다음 세기에는 뭘 먹고 전투하면 효율적일지 생각하다 갑자기 니코틴 패치가 생각나 이 &lt;붙이는 도시락&gt; 계획을 착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가족이 밥상 앞에서 "어서 붙여!" "마저 붙여" "더 붙여" "많이 붙여"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는 성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붙일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기도문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우리에게 일용할 파스 한 장을 주옵시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파스 한 장이면 족한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이 기도 많이 해서 부귀영화, 고대광실을 누린다는 것은 기도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는 내가 희생해서일지라도 남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남이 희생되도록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br/><br/>요즈음 한 무당이 충무공 이순신장군 등의 묘소에 쇠말뚝, 식칼등을 박아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훼손은 충무공 묘소에만 그치지 않고 태조..태종.세종 등 조선조 왕릉 등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모든 묘소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당의 저주기능에 따라 남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건강, 부귀와 출세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현재 활동중인 무당수는 2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가는 돈도 무려 1조4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무당과 엄청난 돈 거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내 후손만 잘 되면 된다는 망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모압으로 진격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낀 나머지 메소포타미아의 점쟁이 발람을 초청하여 저주하여 이스라엘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순간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을 기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민수기 22,23장) 하나님은 결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인간일지라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저주한다고 남이 저주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남을 저주해서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면 세상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제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웃의 축복을 위해, 아니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것은 오직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잘 되신 분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주안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출세했고, 성공했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교회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며 예수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열매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기도하되 성경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강청하여 간구하시면 여러분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하는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예수 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 생활로 인류에게 가장 좋은 성령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일본</dc:creator>
<dc:date>Fri, 07 Nov 2008 23:55: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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