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ㅣ 로그인 ㅣ 회원가입 ㅣ 최근게시물 ㅣ 사이트맵  
ID저장
회원가입 ㅣ ID/비밀번호찾기
신학&선교
선교자료
성경및예배
교육자료
교회사
이단&전도
조직신학
선교일반자료
선교자료
   홈 >  선교자료
 
작성일 : 13-04-16 19:42
시마바라의 난을 통한 역사적 교훈
 글쓴이 : 러브재팬
조회 : 6,270  

[이청길 선교 칼럼 61] 시마바라의 난을 통한 역사적 교훈

[2012.11.23 10:23]

▲이청길 목사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기독교 역사에 가장 불행스럽고 비참한 사건으로 조명되고 있다. 그 당시에 기독교적인 지도자들(지방 영주 및 참모)의 잘못된 판단에 의하여 수만 명의 희생자가 속출되었기 때문에 교계 지도자들의 새로운 각성이 요구되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때는 1637년 10월 25일에 일본 규수(九州) 북부의 시마바라(島原)지역과 아마쿠사(天草) 섬에서 기독교인들이었던 농민들의 민중봉기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 봉기의 중심인물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라는 16세의 미소년이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는 어릴 때부터 마을에서 신동이라 불릴 만큼 총명하였고 신앙심이 매우 깊어서 신통력을 발휘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기리스단(카토릭 신자)의 성주로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기리스단(카토릭 신자)이 되었다. 일본 최초의 선교사로 프란시스 싸비어(스페인) 신부가 1549년 8월15일에 가고시마(鹿児島)에 상륙하여 1591년 9월까지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에 일본은 천하통일을 바라보며 격동하던 매우 혼란한 시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선교활동은 더욱 왕성하여 1605년에는 신자들이 75만 명으로 성장하였고 1614년에는 143명의 선교사들이 일본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인구 2천만 명에 비하면 전체 인구의 2,5%가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처음에는 기리스단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으나 그들의 세력이 점차 확대하게 됨을 두려워하여 금지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성주로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많은 기리스단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강력한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이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막부(幕府)의 세력을 장악한 후 기리스단 금령의 포고문을 전국에 공포하고 전면적으로 금지하여 철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된 이후로 기리스단의 박해가 강화되면서 기독교 탄 압이라는 종교적 성격과 세금 착취라는 민중들의 생존의 문제가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기리스단의 성주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정적(政敵)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최후의 격전지인 세키가하라(關ケ原)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시마바라(島原) 지역의 성주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새로운 성주가 부임하므로 사태는 더욱 악화하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성주는 시마바라성(島原城)을 축조하기 위하여 농민들을 강제 부역에 동원하였고, 계속되는 흉년으로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므로 농민들의 고통이 심각하게 되었다.

결국 분노하게 된 백성들은 1637년 10월에 세금 징수관을 살해하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2만7천에서 3만 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이었다. 이 때에 16세의 미소년이었던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를 반란군의 지도자로 세우고 막부(幕府)의 정예군과 대결하였다. 반란군의 대부분은 기리스단에 속한 농민들이었기에 기독교와 막부(幕府)의 정예군과의 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반란군의 기세가 충천하여 진압군 3,000 여명을 몰살시키고 주변의 성(城)들을 포위 공격하여 그 맹위를 떨쳤다. 애도막부(江戶幕府)에서 1,000여명의 지원군을 파송하였으나 패배한 후 사태의 다급함을 깨닫고 12만 대군을 급파하게 되었다.

하라성(原城)을 포위한 막부(幕府)의 진압군은 네델란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대포20문과 그것을 운용할 100 여명의 인원을 지원받아 포격을 가하였지만 반란군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민중들의 울분과 박해가 신앙적인 차원으로 승화되면서 더욱 단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안의 식량과 물, 탄약 등의 물자들이 고갈되면서 반란군의 사기는 점차적으로 기우려지기 시작하였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는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애까지 친구이다’라는 말로 격려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 말은 지금도 일본의 역사 속에서 일본인들이 다시 듣고 싶은 말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어 있다. 드디어 막부(幕府) 진압군의 총공세로 하라성(原城)이 무너지고 지도자이었던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는 자살하였고 성안에 있던 3만 여명의 백성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아 모두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가 시마바라의 난에서 사용한 깃발에는 그리스도의 성체(聖体)를 뜻하는 것과 양쪽 날개를 접은 천사의 모형이 그려져 있다. 비록 기독교적인 깃발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성전(聖戰)이라고 착각할련지 모르지만 기독교적인 깃발을 들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평정한 막부(幕府)에서는 기리스단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를 포교한 포투칼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므로 선교사들의 입국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도쿠가와 막부(幕府)에서는 기리스단을 위험한 단체로 규정하여 기리스단 색출과 더불어 철저한 박해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만일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일본의 기독교의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은 신앙을 빌미로 한 그 어떠한 보복행위도 정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 어떠한 박해에도 참고 견디면서 순교자의 바른 길을 선택하였다면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독교는 한국과 같은 불미스러운 추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음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역사적인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사랑방선교회 & 한국어교실(韓国教室)
☎ 090-4246-8404 / 070-4623-8404(인터넷)
Copyrightⓒ 2008.10. All Rights Reserved. pastor. Yun Jong hun / daniyun@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