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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6 12:06
[논문]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와 예배에 대한 고찰
 글쓴이 : SWIM
조회 : 640  
[논문]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와 예배에 대한 고찰

(리폼드뉴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접하게 된다. 기독교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방송을 틀면 언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검색하여 들을 수 있다. 참으로 편리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넘쳐나는 설교들 중에 참된 설교보다는 듣는 시간이 아까운 설교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설교를 듣는 청중도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설교를 분별하고, 어떤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180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을 주도했던 칼빈주의자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와 예배하는 글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원래 이 글은 바빙크가 “De predikdienst”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그리고 후에는 Kennis en Leven(지식과 삶)에 포함된 글이다. 우리 말로는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이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다함에서 출판된 책 137-154쪽에 수록되어 있다.

 

I. 교회 예배의 설교에 대한 현대의 문제점

 

헤르만 바빙크는 “교회 예배의 설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강력한 강단의 시대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라고 했다(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39). 이 한 구절에서 우리는 헤르만 바빙크가 살던 네덜란드 교회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이런 현상은 점점 더 가중되고 있다. 바빙크가 살던 시대보다 현시대는 더욱더 그렇다. 코로나19로 전 세계는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교회의 대면예배를 막았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명령을 내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방역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예배도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의 설교에서조차 복음이 빠졌다면 얼마나 암울한가?

 

오늘날에는 점차 교회에 대한 회중의 관심이 멀어져가고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도 감소하고 있다. 더 재밌는 것, 더 웃기고, 더 감동적인 것을 찾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딱딱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하는 평가를 하면서 설교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현상은 아니다. 바빙크가 살던 시대에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다시 교회를 방문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다고 언급하고 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39).

 

고재수 교수는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되어져야 합니다”라고 했다(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서울: CLC, 1987), 서문). 하나님의 말씀은 중생을 일으키는 수단이다. 그 복음은 현재까지도 전파되고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설교를 계속된다. 그런데 그 설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 설교되어야 한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빠지고 세상의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윤리 도덕적 이야기만 전해지면 회중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현대는 감성주의가 시대를 이끌고 있다. 감성주의에 사람들은 쉽게 이끌린다. 그래서 교회도 설교도 감성주의가 이끌고자 한다. 설교에 감성적 내용이 없으면 거부한다. 설교에 울고 웃기는 내용이 없으면 재미없는 설교, 은혜(?)없는 설교라고 한다. 과연 울고 웃기는 것이 은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추구하고 이런 설교를 듣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오늘날 회중은 하루 종일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을 거부한다. 온 교인들이 함께 모여 한 주 동안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인도하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빨리 끝내고 집에 가거나 야외로 나가려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왜곡된 것이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1부-4부, 많게는 6부-7부로 나누어 그 가운데 한 시간만 갔다 오면 주일성수를 다 한 것으로 이해한다. 일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왜 아까운 시간을 교회에 가서 두 시간 이상씩 앉아 낭비하고 있는가? 이것이 현대 세대들의 사고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시대는 속도가 우선시된다. 그래서 인터넷도 속도, 스마트폰도 속도, 자동차도 속도, 컴퓨터도 속도를 우선시한다. 빠른 속도를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을 낭비라 여기고 아까워한다. 어떤 이들은 그 시간에 오히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보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바빙크는 “교회에 대한 이런 반감은 상당 부분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과 관련하여 분명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 영향 아래 ”교회에 간다“는 말에 대한 개념이 전적으로 잘못 형성되어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0).

 

오늘날 현대화는 바로 이런 설교와 예배에 대한 생각들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현대화는 가장 빨라야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교회도 역시 말씀 아래 침묵하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는가? 교회를 구경하고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가?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II.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

 

현대화는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즉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일이 상당히 많다는 생각, 수동적이지 않으며 도리어 분주하고 활동적이라는 생각, 우리 아버지의 사역에 동참하고,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 즉 우리 자신이 세워지고 신앙 안에서 자리를 잡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장 거룩한 신앙 안에서 참되게 구비되고 세워지기 위해 우리가 거기서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종의 오해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3).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그런데 그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오해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사장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강조한 만인제사장론이 그것이다. 만인제사장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누구나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제나 다른 제사장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제사장의 사역은 더 이상 옛 언약 아래에서 중보자적인 사역에 있지 않다. 당시에는 특별히 제사장권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배를 관장하는 것, 희생 제사, 천상의 영적 제사 즉 새 언약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제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을 경배할 때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예물을 드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므로 이루어진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3).

 

바빙크는 이것을 둘로 제시한다. 첫째는 공적인 부르심, 둘째는 공동체적 부르심으로 본다. 공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치와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때 온 세상이 그것을 듣는 것이 합당하다. 다음으로 공동체적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참이스라엘로부터 분리했던 것 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몸 밖에 있는 개인과의 교제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4).

 

교회의 예배는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빼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상할 수 없다. 즉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런데 그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빼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교회의 모임은 안식일에 열린다. 각 개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제사장들이 있고, 백성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찾아온다. 하나님께 나와 예배(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백성은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탄원과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본질이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주일마다 경험하게 되는 기쁨이다. 이렇게 우리는 천상의 회집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성되어 함께 그 한 가지 일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은 이 연합의 표로 우리의 모임과 천상의 모임에 모두 존재한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1장에서는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드려야 하며, 그에게만 드려야 하고, 천사들이나 성도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예배해서는 안된다. 또 타락 이후에는 중보가 없지 않으나 다른 어떤이의 중보를 통해서는 예배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예배한다”고 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1장. 2)

 

기독교의 예배는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빠진 예배는 기독교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나 다른 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기독교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예배는 습관적으로 참여해서는 안되는 고귀한 예식이다.


III. 예배와 설교

 

회중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설교만 듣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교회에 끌려나와 설교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설교자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헌금은 무가치한 것인가? 찬송은 무가치한 것인가?

 

설교자의 소명은 교회의 예배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는데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켜 교인들이 단지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또 설교가 가장 고상하고 유일한 특징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함께 섬기고 신자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사랑과 예물을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인식한다면 예배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욱 고귀하고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5-146).

 

예배라는 것은 한 가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즉 설교를 듣기 위해서만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가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설교에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예배의 의식을 무시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빙크는 더 중한 책임이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늘어나는 과실에 대한 회중들의 책임이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회중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더 중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설교자 자신들에게 있습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6)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예배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예배에 참여한 회중이 예배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예배에 바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배의 모든 순서들 즉 예전은 모두 각기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예배의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설교는 제사장적 모임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상당 부분이 설교에 좌우된다. 종교 예식에서 설교는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부분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6).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설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공손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데 설교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 70).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지능이 높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합동신학대학원의 이승진 교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볼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실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 과정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이승진,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 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가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읽거나 노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입으로 설교된 말씀의 방편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롬 10:7).

 

그래서 성도는 설교자가 단순히 그들 앞에서 설교문을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 말씀을 선포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설교하는 일에 복을 더하실 것이다. 회중들의 믿음이 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그분의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회중들이 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로 말미암음이요 이는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언약의 표와 인과 관계된 설교를 통해 회중들은 거룩한 믿음 안에서 더 강해지고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은 순결함 안에서 보호받고 전투 가운데 격려를 얻으며 고난 가운에 치유 받고 신앙고백 안에서 굳게 세워집니다. 양떼는 설교를 통해 교회에 머무르게 되고 교회는 그 양떼와 함께 권위와 존경과 예배가 더욱 흥왕하게 됩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7)

 

설교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설교자라는 직무의 가치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감추심으로부터 나누어주시는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직책,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임과 부르심은 전달하는 자에게 막중하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7).

 

설교는 예배에 있어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이에 참여해야 한다. 그 책무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혹 설교의 열매와 소산에 대한 감식전문가로 스스로를 여기는 자는 누구든지 불평할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웅변가나 강사의 표준으로 설교자와 설교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회중이 있고 무수히 많은 설교자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가 반드시 웅변가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결함이 있다는 것과 같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소수의 설교자들에게 웅변술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8).

 

많은 설교자들이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모세처럼 입이 뻣뻣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어찌 설교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설교자가 가진 학문, 지식, 언어, 습관, 방식을 다 동원해 설교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도우심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설교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빙크는 또한 “우리는 말씀의 사역자가 주일에 두 번 설교해야 하고 여전히 주중의 다른 경우에도 설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그의 다른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그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최신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148).

 

설교자에게는 매우 많은 설교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래서 그 설교를 준비하다가 지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그만큼 귀중하고 중대하기 때문이다.

 

번 포이트레스 박사는 “성경 자체가 성경이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이끌고 관장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기록된 결과는 인간의 산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사소통이다”라고 했다(번 S. 포이트레스,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58).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분이고, 우리를 설교자로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능력, 지식을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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