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원래 유대교를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그 발상지는 예루살렘이며 중근동(中近東) 지방에서 발생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종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교라는 기독교는 사실상 유대계 기독교의 한 종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경교도들의 행동은 유대교적이며 유대의 문화적 사상을 중앙아시아 깊은 곳까지 전파한 공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은 중국 사회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 사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경교 신자들의 대부분은 유대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었고, 유대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도 바로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상과 신앙에 대한 투쟁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적인 종교의식과 율법사상을 배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추측하게 된다.
경교 신자들의 대부분의 행동 양식은 완전한 유대적인 것으로 유대의 전통적인 행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남긴 종교적인 유물과 문화적인 유산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파 경교는 638년 당의 태종(太宗 在位626-649))에 의하여 수도원 설립이 허가되었고, 당 태종의 비호 아래서 교세가 계속 확장되었다. 781년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울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 비문에는 경교의 중요 교리와 역사가 기록되었고, 황제에 대한 상찬과 그 당시의 사제와 수도사들의 이름 및 직위 등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석비는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메몰되었다가 1625년에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의 서북에 있는 당나라 수도 장안의 대진사(大秦寺:경교의 사찰)의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경교는 200년간(600-800) 왕성한 포교활동을 통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지만 845년경에 회창금교령(會昌禁敎令)이 발효되면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는 등 경교승들이 환속되고 말았다.
879년에는 황소의 난 때에는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살아남은 경교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약 200,000명의 경교도들은 박해로 인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도래(渡來)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경대학의 사헤끼 요시로(佐伯好郞)박사는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경교학자로서 오래 동안 경교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경교박사로 공인된 사람이다. 사헤끼 박사는 중국에서 왕성하던 경교가 실패하게 된 원인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외국인의 종교로 시작하여 끝까지 외국인의 종교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중국 본토인들의 평신도와 성직자를 양성하지 못하였고 민중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중국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교가 불교 경전의 용어를 그대로 달습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를 토착화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경교의 선교사들이 어려운 한문을 바로 이해하여 기독교적인 교리를 바르게 설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