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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01 14:43
일본의 기독교문학에 보는 일본사회와 일본사람
 글쓴이 : 말씀사랑
조회 : 5,357  
일본의 기독교문학에 보는 일본사회와 일본사람

엔도오 슈사꾸의 소설을 중심으로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무조건으로 항복하기까지, 일본근대문학에는 기독교문학이라고 할만한 작품이 많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문인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금방 생각나는 몇 사람의 이름만 손꼽아도 토쿠토미 로까(1868-1927)를 비롯하여 나가용요시로오(長與美郞,1888-1961), 아쿠타가와 류오노스께(1892-1927)와 그의 제자인 호르 타쯔오(1904-1953)등의 작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독교에 관심들을 가졌었다. 아니 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 중 개화기에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화제를 모은 일본의 명치소설 <불여귀(不如墳 )>의 작가 토쿠토미는 어려서부터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가며 자랐다. 또한 종형들이 창설에 관여한, 지금도 쿄토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동지사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후에 세례를 받고 한때는 선교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동지사 대학은 시인 윤동주가 유학했던 곳이기도 하다. 토쿠토미는 특히 러일전쟁 중에 세계적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06년에 성지 팔레스티나를 순례하고 나서 그 길로 러시아까지 톨스토이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에 톨스토이적인 인도주의 사상이 짙은 글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생 시나 소설을 통하여 기독교 문학을 창작하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자가는 아마 나가요 요시로오였을 것이다. 그리고 <청동(靑銅)의 기독(基督)>이라고 제목한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만큼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온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잡지<가이조오(改造)>지 1923년 정월 호에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작가 나가요가 그 전해인 1922년 가을에, 큐우슈(九州)지방의 나가사끼(長崎)에 사는 나가미 토쿠타로오한테서 유우사(裕佐)라는 남만주물사(南蠻鑄物師), 곧 기독교와 관계되는 가지가지 제기들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어떤 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할 만한 기구한 비극적 운명>을 발견하여 쓴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이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가나 시인들은 흔히들 이러한 소재를 이국(異國)정서적인 흥미본의로 다루어 온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나가요는 이 소설에서 소재를 정면에 놓고 진지하게 다루려고 애쓰면서도 가지가지로 상상력을 살려가며 창작하였던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봉건적 유교체제 아래 있었던 토꾸가와시대에 청동의 크리스트상(像)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만들어낸 바람에 엄금이 되어 있는 천주교를 믿는 교인으로 오해받아 말경에는 토꾸가와 바꾸후(幕府)에 의하여 무참하게도 처형당하고 마는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젊은 장인의 고뇌를 중심으로, 교인의 딸에게 실연한 주인공이 유녀(遊女)에 대한 정욕에 빠지는 이야기 등을 곁들여 가면서 순교자의 참모습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특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코로비 바테렌> 곧 가지가지 탄압과 고문에 못 이겨 신앙을 버리고 배교자가 되고마는 펠레이라 신부(神父)의 감동적인 조형성이 크게 평판이 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나가요는 봉건적 유교체제 아래에서의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기울여 태평양전쟁에 패전하여 10년이 지난 1956년에는 <청동의 기독>의 후일담인 <키리시탄 야시키>, 즉 펠레이라 신부처럼 비밀리에 일본에 잠입하여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외국인 선교사를 가두어 두는 넓은 옥사를 제재로 한 장편소설을 창작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 평론가이기도 했던 나가요는 토쿠토미 로까와는 대조적으로 카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아니었다. 메이지(明治)유신 후 새 정부의 고급관료로 활약한, 귀족들과도 인척관계가 많았던 상층계급의 명문가정에 태어나, 스스로도 귀족들의 자제나 명가의 자제들만이 다닐 수 있었던 가꾸슈인(梁習院)에 입학하여 우리 나라 문화와도 인연이 깊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과 함께 학교에 다녔으며 톨스토이, 니이체, 무교회주의 기독교 목사로 알려졌으며 우리 나라 함석헌 선생에게 영향이 컸었다는 우찌무라 칸조오들의 저서를 즐겨 읽으며 자랐다. 그리하여 특히 일본근대문학사 뿐만이 아니라 근대문화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문예동인<시라카바>파에 참여함으로써 정신적으로 현저하게 성장하였다. <시라카바>파란, 1910년에 창간되고 23년에 관동대진재를 계기로 폐간되는 미술․문예 월간동인지<시라카바>를 발간하면서 발족한 무샤노코지 사네아쯔(武者小路實爲), 시가 나오야,(志 直哉), 사또미 톤(里見惇),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郞), 아리사마 이꾸마(有島生馬), 야나기 무네요시, 나가요 요시로오 등 당시의 소장파 문인 및 화! 가들과 이들의 생각, 주장에 동조한 문인이나 미술가, 예술가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개성주의,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하여 강렬한 자아의식과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한 이상주의적인 경향으로 메이지문학 다음에 오는 타이쇼오(大正)문학이라고 불린 이 시기의 문학과 문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이들은 자연주의에 항건하고 인도주의․이상주의를 표방하여 자연주의 문학이 퇴조한 후의 타이쇼오 문단을 지배했으며, 미술에도 관심을 보여 인상파를 일본에 소개하는 등 이 방면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아쿠타가와 류오노스께도 1918년에 발표한<봉교인(奉敎人)의 죽음>을 비롯하여, 다음 해에 발표한 <키리시토호로 상인전(上人傳)>, 1922년에 발표한 <보은기(報恩記)>, <신들의 미소>, <나가사끼 소품>, <오깅>, 1924년의 <이또죠 각서>등 일본의 근세 초기에 기독교를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 또는 기독교문학의 형태를 가진 결코 적은 수라고 할 수 없는 소설들을 계속적으로 발표하여 그의 역사소설의 한 분야가 기독교 방면이었음을 명시하였다. 이들 소설에서 아쿠타가와는 과연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신들의 미소>의 의미』란 표제로 이 작품에 대한 짤막한 평문을 쓴 엔도오 슈사꾸(1923-1996)는 그 글에서 이 작품이 <무서운 것은, 아쿠타가와 류오노스께가 노인의 입을 빌려서, 어떠한 외국의 종교도 사상도 거기에 옮겨심기만 하면 그 뿌리가 썩어버리고, 그 실체가 소멸되어 외형만은 틀림없이 옛것 그대로이지만, 실은 사이비적인 것으로 변해버리는 일본의 풍토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쿠타가와의 중학교 시대의 후배이자 제자인 호리 타쯔오도 스승인 아쿠타가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반면에 기독교를 주제로 한 스승의 작품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움을 느껴 왔으며, 스스로도 언젠가는 기독교소설을 써볼 굳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호리의 부인 타에꼬도 만일에 남편이 <기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만 있습니다>라고 증언한 일이 있다. 만일에 호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이 패전한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53년에 50여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호리의 소설이 전체적으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쌓여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그가 본격적으로 기독교문학을 창작한 흔적을 찾아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쿠타가와의 경우에 대하여 다시금 언급해야 하겠다. 그가 많다고 할 수 없어도 그 나름으로 기독교문학을 발표한 것은<무언지 나의 앞날에 대한 오로지 막연한 불안>을 느낀 결과 1927년 7월 27일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기 5년 전 일이었다. 유고의 한편이 된 단편소설 <톱니바퀴>가 상징하고 있듯이 예술지상적인 태도가 강했던 그는 만년에 가서 시대상황과 그 동향에 심히 예민해지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데다가 신경쇠약 등으로 체력의 쇠퇴가 심해진 나머지 자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불안하게 한 시대상황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첫째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둔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과 이에 힘입어 한 때는 일본문단을 석권하다 십이 한 프로레타리아문학의 대두와 진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쿠타가와의 예술지상적인 태도가 프로레타리아문학의 가상(假想) 적(敵)으로 지목되어 그는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러시아 혁명의 석공에 고무된 좌익세력의 진출을 경계해 온 군부와 우익세력에 의하여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진재를 기화로 한 대학살사건을 둘 수 있겠다. 이 진재를 계기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적지 않은 소위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토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살고 있었던 숱한 <조선사람>들이 일본 경찰과 일본군의 헌병대, 시민들로 조직된 경방단에 의하여 무참하게도 학살당했다. 이 일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이다. 당시 토쿄에서 중학교에 유학했었던 월북작가 이기영은 이 진재를 겪고 진재 직후에 달아나다 십이 해서 고국으로 귀국했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있다.

셋째로 1925년 3월에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5월에 실시되었다. 말을 바꾸면 신경이 예민해진 아쿠타가와가 앞날에 대한 <오로지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에 알맞는, 아니 <막연한 불안>이 나날이 현실적인 불안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아쿠타카와가 자살하고 나서 4년 후인 1931년 7월에 중국․만주 땅에 이주했던 우리 나라 교민과 중국 농민들이 충돌한 <마보산 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이라는 일본군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이 터지고만 사실은 그것을 웅변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이에 이어서 다음해 1932년 5월 15일에는, 해군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일본 국내에서도 육군사관후보생과 아이쿄오주꾸의 학생들이 합세하여 수상관저를 습격하여 이누까이 쯔요시 수상을 총살하여 정당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5󈸟사건이 터진다. 군인들의 반란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에는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국가개조와 통제파 타도 등의 구호를 부르짖고 1,5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 등을 습격하여 3𔅩독립운동 직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온 일이 있는 당시의 내대신 사이또오 마꼬또, 대장대신 타카하시 코레키요, 교육총감 와따나베 조오따로오 등을 살해하고 국회 주변을 점검하여 27일에는 계엄령을 공포! 하는 속칭 2󈸪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자체는 29일 천황에게 항거했다는 죄명 아래 진압되나, 그 후 숙군․군대 내부를 숙청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정치에 대한 군부의 지배적 영향은 무척 강해진다. 다음해 곧 1937년 7월 7일, 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본격적인 침략전쟁인 소위 일중전쟁이 발생한 사실이 그것을 여실히 설명하고 있다.

아쿠타가와 류우노스께가 느꼈던 <막연한 불안>은 드디어 이러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제자인 호리 타쯔오가 설령 기독교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기독교문학을 창작하려고 애쓴들 사회환경은 그것을 허용치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등대사>라는 극히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모인 단체에 소속했던 약간의 교인들이 겨우 군국주의에 항거하다가 순교했을 뿐 일본에서는 개신교와 카톨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기독교단체나 교회, 그리고 교인들이 군국주의, 나아가서는 천황제에 영합하고 있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아니 우리 나라서도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황국신민화운동을 강요당하고 여기에 저항한 여러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사실을 순교한 상기한다면 당시의 사회적인 동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문단에 본격적인 기독교문학이 등장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군국주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패전 후 얼마 안되어 기독교인으로서 등단한 시이나 린조오(1911-73)의 뒤를 잇다싶이 하여, 시마오 토시오(1917-86), 엔도오 슈사꾸, ! 미우라 슈몽(1926- ), 타나까 스미에(1908- ), 야시로 세이이찌(1927- ), 소노 아야꼬(1931- ), 아리요시 사와꼬(1931- 84), 오가와 쿠니오(1927- ), 모리우찌 토시오(1936- ), 사까따 히로오(1925- ), 이노우에 히사시(1934- ), 아베 미쯔꼬(1912- ), 미우라 아야꼬(1922-99), 모리 레이꼬(1928- ) 등 문단의 중견을 차지해 온 결코 적은 수라고 할 수 없는 교인문인들이 계속하여 등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대부분이 카톨릭에 속하고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특히 그들의 대부분이 일본 군국주의들이 저지른 태평양전쟁을 청소년기에 체험하면서 자란 세대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두말할 것 없이 교인문인으로서 그들이 추구해 온 문제의식은 제각기 다르다. 군국주의 시대의 생태를 뼈저리게 체험한 세대에 속하는 시이나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리는 증인으로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원죄의식을 추구하는데 힘쓴 시마오는 구혼의 비제(悲祭)를 올리는 사제로 알려졌으며, 미우라는 현대인을 고발하는데 열중하게 되었다.

숙명의 구제를 주제로 삼은 타나까나, 거룩함을 동정한 야시로는 희곡의 무대에서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는데 힘썼다. 소노는 사랑의 미학을 추구해 온 여성작가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인간선언을 한 아리요시, 언어의 사도(使徒)가 된 오가와, 수난에의 출발을 시도한 모리우찌 등 제각기 나름대로 각자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애썼다. 그러면 이 글에서 부제로 삼아 등장시킨 엔도오 슈사꾸의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그는 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추구한 작가였다. 아니 단지 신의 존재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노랑색 사람> <흰색 사람> <마지막 순교자> <침묵> <바다와 독약> 등 그의 일련의 기독교문학은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신이 서구라파의 기독교 문화권도 아닌 일본 풍토에서 과연 뿌리를 내리고 제대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를 끈질기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앞에서 살펴 온 것처럼 아쿠타가와 류우노스께가 보여준 문제의식과 맥이 통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엔도오도 장편소설<침묵>에서 <코로비바테렌> 이라고 불리던, 토꾸가와 바꾸후의 관리들에 의한 교묘하고도 지독한 억압과 고문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해 배교(背敎)하고 마는 펠레이라 신부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자랑삼아? 일본인들이 내가 가르친 신을 믿어주고 있었더라면 말이지. 하지만 이 나라에서 우리가 세워온 성당에서 일본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신에 대해서가 아니었네. 우리한테는 이해도 안 되는 그들의 굴절된 신에게 기도했었단 말일세, 만약 저런 것도 신이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아니 분명히, 저런 것을 신이라고는 안 해, 거미줄에 사로잡힌 나비와 똑 같애. 처음에는 그 나비는 틀림없이 나비였었지. 하지만 다음날이면, 그것은 외형만은 나비의 날개를 달고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실체를 잃어버린 시체가 되어 간단 말이여. 우리가 믿는 신도 이 일본 땅에서, 흡사 거미줄에 사로잡힌 나비처럼, 실체를 잃어버린 죽은 몸이 되고만 것이여> <이 나라는 땅바닥이 물러빠지고 깊이 물이 괸 늪과 같단 말이야, 언젠가는 자네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걸세. 일본이란 이 나라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무서운 늪이었었어. 어떤 교목이라도 그 늪에다가 심어지면 뿌리가 썩어 들기 시작하는 거야. 잎이 누래지고 말라빠져 버리는 거야. 우리는 그런 늪에다가 기도교란 묘목을 심어버리는 거지.>

1966년, 엔도오는 43살 때 쓴 그의 대표작의 한편으로 볼 수 있는 소설<침묵>에서 카톨릭 이에즈스회의 지시로 일본에 잠입한 포루투갈 출신의 신부 펠레이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하게 했었다. 이 소설의 무대는 오늘의 큐슈․나가사끼 지방, 때는 <시마바라(烏原)의 난>이 진압된지 얼마 안되는 1640년대의 어느 시기 1637~38년 사이에 나가사끼에서 멀지 않는 시마바라․아사쿠사(킹즌)지방에서 농민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의 반란이 <시마바라의 난>이다. 임진․정유왜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들도 적잖게 살게 되었다는 이 지방 사람들은 본래 기독교 신앙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토요토미시대와 그뒤를 이은 토꾸쿠가와 시대가 되자 기독교를 엄금하는 금교정책을 쓴 바람에 교인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시마바라 령주의 가렴주구가 겹쳐져서 1637년 10월에 먼저 이 지방 농민들이 봉기하고 여기에 아마쿠자 농민들과 교인들이 호응하여 일어남으로써 일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객지에 끌려가서 기독교인이 된 우리 나라 출신자들도 다수 참여한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반란은 다음해 2월! 말에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담자들의 대부분은 몰살당하고 금교정책은 더욱 엄해졌으며 쇄국의 문도 또한 단단해져 갔다.

<시마바라의 난>이 있은 지 얼마 안된,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찾아내어 배교를 강요하거나 처형하거나 하기에 정부당국자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쇄국 일본의 시마바라․아마쿠사 지방에 두 사람의 포르투갈 출신의 젊은 사제들이 잠입한다.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그들은 무사히 상륙하였으며 기독교인이란 정체를 숨기고 살고 있는 신도들과도 연락이 닿고 하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포교활동도 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체포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배교를 요구하는 관리들에 들볶이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가 결국은 배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까지 이르고 만다는 게 이 소설의 개략이다.

앞에서 보아온 펠레이라 신부의 고백은 신학교에서의 제자이자 사제로서는 후배이기도 한 세바스챤․로돌리고에게 배교를 권하면서 한 것이다. 지난날에는 아주 <드물게 보는 신학적 재능>과 <불굴의 신념>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 온 펠레이라․크리스트반 교부(敎父)는 모진 고문을 받아 온 끝에 굴복하여 배교하였을 뿐더러 지금은 토쿠가와 바꾸후로부터 사와노 추우안이란 일본 이름과 순교한 일본 기독교인의 처자까지 얻어서 목숨을 이어가는 처지가 되면서 한 말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들을 살펴볼 때 이 작품이 분명 역사소설이란 점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역사소설로만 이해한다면 역시 정확한 이해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현대소설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시대배경도 작중의 사건도 등장인물들도 모두 1640년대의 그것들인데도 어째서 현대소설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사실 엔도오가 이 소설에서 취급한 사건이나 등장시킨 주요인물들은 역사적인 사실과 실재한 인물들에 근거하고 있다. 엔도오 스스로도 이 작품의 후기에 쓰고 있듯이 말경에는 배교하여 오까다 상에몽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 세바스챤․로돌리고가 실재한 인물 쥬젯빼․캬라 즉 오까모또 상애몽이였던 것처럼.

그런데 어째서 이 소설을 현대소설로 볼 수 있다는 것일까. 일본이 봉건체제에서 탈바꿈하여 개화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시기를 일본에서는 문명개화란 말로 표현하고 있듯이 모든 문들이 서구라파사회에 활짝 열렸던 시기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 사람들이 서구사회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이려고 애쓴 대상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물질문명이었다. 우리 나라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있었듯이 서구사회의 물질문명을 추구하는데 초점을 맞춘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라는 말로 그 자세를 표현했던 것이다. 1868년에 있었던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은 화혼양재의 정신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물질문명을 추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구사회의 정신문명까지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서구사회의 정신문화라면 기독교가 그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받아들이자니 아쿠타가와의 경우처럼 화혼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후의 일본에서는 서구사회의 정신문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될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문제가 남는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1968년에 발표된 사까따 히로오의 단편소설 <음악입문>이 그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문명개화기에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음악에 매혹된 <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들은 연애결혼을 했고 사랑하였다. 그들이 사랑한 서양음악 속에는 무른 찬송가도 들어 있었다. 그들의 가정은 그러므로 늘 기독교적인 사랑과 찬송가로 넘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의 일생에 대하여 <나>는 우습게 보고 있다. 부모들은 진짜 기독교인도 아니고 진짜로 서양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던 것이다. 부모들이 이러한 허위허식을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밝혀나간 것이 <음악입문>인데 이 소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기독교라는 일신교를 토대로 하는 서구사회와 문화, 그리고 다신교 또는 범신교적인 일본사회와 문화란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런 이질적인 서구문화를 과연 일본사람들이,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문인들이 과연 내면화 혹은 체질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사끼따나 엔도오가 작품들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점이다. 말을 바꾸면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인문인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민감한 문제의식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서 이 문제가 아직은 해결 안된 채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 온 바로는 사까따나 엔도오는 이 문제를 일본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낮 아폴리아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넘어서지 못하는 아폴리아로 남을 것인가.

소설<침묵>에서 엔도오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아폴리아를 넘어서는 길의 모색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여 아폴리아의 초극을 시도하였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펠레이라 신부나 로돌리고 사제의 배교행위였던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배교를 요구하며 고문하는 토쿠가와 바쿠후의 하급관리들 앞에서 <오라쇼> 곧 기도하는 말을 부르짖고 찬송가를 부르며 배교를 거절한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후미에>라고 불리는 나무판에 박힌, 크리스토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銅版)을 밟는 행위를 끝끝내 거절해야만 한다. 동판을 밟는 행위는 바로 크리스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이 교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로돌리고가 본 동판에는 숱한 일본사람들에게 밟혀온 바람에 시커먼 엄지발가락 자취가 남아 있었다. 또한 거기에 새겨진 크리스토의 얼굴도 마멸되고 굽어들어 괴로운 듯이 그를 바라보며 눈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밟으라고, 밟으라고,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는데 아니냐>고. 그런데 굴복한 게 아니었다. 후미에를 하고 배교한 일본인 교인들을 다시금 잡아와서는 귓밥 뒤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놓고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게 한 다음, 좁은 구멍에 거꾸로 달아매는 고문에 못 견뎌 신음하는 소리를 듣게 하는 말하자면 정신적인 고문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을 받고 괴로워서 내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로돌리고는 피를 토하듯이 수백번 기도했다.

<주여, 당신은 이제야말로 오랜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정이며 선한 것이며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 땅위와 사람들에게 명시하기 위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그러나 신은 여전히 침묵할 뿐이었다. 이 소설의 표제가 여기에서 비롯하고 있음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엔도오는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엄청난 물음에 대한 회답은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로돌리고의 배교행위가 실은 신을 배반해서가 아니라 크리스토는 배교자들에 의하여 발로 밟혀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있었다는 역설을 통하여 나름대로 일본에서의 서구문화의 토착화에 대한 길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우식

윗 글은 일본선교동지회(JMF) 선교자료의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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