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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01 14:16
마 26:69-75
 글쓴이 : 재팬사랑
조회 : 3,028  
마태복음 26장 69~75절

남몰래 흘리는 눈물


1. 서론

지난 2007년 9월 6일에 71세로 유명을 달리한 세계적 테너 가수, 하늘이 준 음성으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일찍이 불렀던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란 독창곡이 있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19세기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대농장주의 딸 아디나, 그녀를 사랑하는 소박한 시골 청년 네모리노 그리고 밸코레 하사관 등, 세 사람을 둘러싼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아디나는 네모리노에게 실망하여 벨코레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떠돌이 약장수 돌카마라에게서 사랑의 묘약으로 알고, 포도주를 사 마십니다.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사는 일, 그 약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벨코레에게 입대하겠다는 계약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아디나는 자신에 대한 네모리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며 눈물을 짓습니다. 약삭빠른 둘카마라는 그녀에게도 약을 팔려고 하지만, 아디나는 자기 힘으로 그의 사랑을 차지해보겠다고 거절합니다.

숨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네모리노는 아디나도 자기를 사랑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기쁨과 감동을 노래합니다. 바로 남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그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입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흘렀소. 유쾌한 젊은이들이 질투하는 듯해요"로 시작되는 가사입니다.

2. 본론

차원은 다르지만, '남 몰래 흘리는 눈물' 중에는 고난의 언덕을 홀로 헤치고 오르기가 지쳐서 홀로 우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자기 비애 때문에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요셉이 사랑하는 친 동생 베냐민을 보고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남모르게 흘린 눈물도 있습니다.(창 43:30)

그러나 본문 말씀의 베드로의 눈물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밖으로 나가서 '남 몰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남 몰래 운 경위를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소명했을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날 때, 주님은 고독에 젖었습니다. 당신 자신의 동족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시기하여 올무를 놓아 예수님을 죽일 첫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현혹되어 주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상의 기독관'을 물어보자, 위대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흐뭇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강경한 표현까지 써서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저는 감옥에라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의 약속을 굳게 다짐한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다 넘어가고 다 굴복 당하고 다 변절하고 다 배신한다 해도, 오직 베드로만은 끝가지 버티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세인들이 기대를 걸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베드로야말로 살아있는 양심이다", "굽힐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다", "무릎을 꿇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으리라"고 말했던 반석같이 믿음직하고 굳센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쉽게 변절했을까요? 이 점은 베드로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서의 문맥에서 생각해봅니다. 비록 순간적인 변절이요 불가항력적인 힘에 눌려 그랬다지만, '베드로 자신에게는 마음의 갈등과 투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하고 싶어 한 일이 아니고, 쫓기고 눌리고 강요당한 심리적·정신적 압박감에서 행한 변절이요 배신인 줄 알게 될 때, 그런 내적 충격과 갈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추측할 수 있겠는가를 상상해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 중에 베드로와 같지 않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지 각자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거리를 두고 도망갈 자세로 그 결과를 보려고 갔는데 유대 지도자들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누구라도 그 장면에서 예수의 제자라고 큰소리칠 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오히려 주님께는 변절이지만, 베드로 그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않았습니까. 엉거주춤하게 굴지는 않았으니 회색분자는 아니잖습니까? 일찍이 주님께서 "예", "아니오" 하라고 하셨으니 그래도 베드로는 "아니오"를 분명히 했습니다.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처음부터 현실주의자가 되어 가야바에게 매수당하고 처음부터 빌라도 권력에 타협하여 반역자가 된 '가룟 유다'보다는, 훨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요 이상과 현실, 원리와 실제라는 두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 '우리들 각자는 어떠했을까?'가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본 모습은 변절한 것보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痛哭)하니라." 베드로의 진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미 쏟아진 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깨닫고 통곡한 눈물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어 그 땅을 적시고, 그가 약하여 배신한 그 역사의 하늘에서 눈물의 소나기를 쏟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골수에서부터 아파하는 그 회한의 눈물, 후환이 두려워 강경히 부정했던 자신이 비굴한 현실주의가 되고 말았음을 솔직히 긍정한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분위기에 영합한 회개가 아닙니다. 홀로 주님만 상대한 남몰래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분명히 눈물 이상의 짙은 액체(液體)였습니다. 뛰는 심장에 고동으로 생긴 안구의 출혈이 밖으로 쏟아진 피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남에게 보여주기가 싫고, 주님의 전지(全知)와 사랑에 쫓겨서(눅 22:61), 혼자 마음껏 울 수 있는 회개의 장소를 택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어두움 속에서 터뜨린 통곡, 목이 메여 울고 또 운 오열, 사나이 대장부의 비장한 각오와 외로운 울음이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일당이다. 나도 잡아가라"고 대들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려 울었지만, 베드로 그 자신은 자신 속에 이미 만들어진 어두움을 슬퍼해 동물보다 못한 자신을 통탄해 또 한번 크게 울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말미암아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져 멸망으로 줄달음 친 죄악의 깊이를 바라 본 격분, 이것이 베드로의 남모른 통곡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회개(悔改)이었기에 이 울음은 위대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고독한 통곡이 너무나 진실했기에 그의 변절의 과오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인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했고, 그는 주님을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비록 멍든 심장을 가졌으나, 그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로 생각하고, 초대 교회 군중 앞에 서서 예수의 증인 노릇을 했을 때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를 시켰던 것입니다.

은밀한 회개가 없는 한국교회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내, 십자가 밑에서 '주여, 주여' 가증한 목소리로 기도드리는 무리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진면목이 빛난 것은 자기를 똑바로 본 깨달음입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뉘우침! 이것처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던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새벽닭은 우는데, 고독한 통곡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부끄러워야 혼자 남 몰래 골방기도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셨고,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와 선행은 은밀하게 숨어서 남모르게 오직 하나님만 대상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 대신에 비본질적인 것'으로 대치했기에 야기된 문제입니다. 질적인 영혼의 문제, 즉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인 세속적 물량주의가 한국교회의 정체성(Identit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한국교회는 새벽제단마다 양떼들 때문에 아파하는 목자의 눈물 자국이 있었고 성도들은 사랑하는 목자를 위해서 눈물 뿌린 골방의 기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교계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 은밀한 기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본질적 요소가 살아져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본래적인 교회 모습으로 되돌아 가야합니다.

3. 결론

자, 끝맺음을 합시다. 이제 저는 그 후 감옥에도 즐겨 갇혔던 베드로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비록 '쿼바디스'의 실수를 또 한번 저지를 수 있었다고 해도, 그의 배신은 그의 고독한 '통곡'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 교회 역사를 그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황송한 것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의 장엄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롬 6:20)는 말씀은 이런 외로운 통곡을 전제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 변절한 베드로여! 분위기에 휩싸인 회개가 아니라, 홀로 마음껏 통곡한 베드로여! 실패의 쓴잔이었기에 회한을 통한 환희의 축배를 들었고, 위대한 소명감에 재귀한 당신, 죽기까지 스승의 증인으로 살다 간 당신이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보낸 당신의 일생 찬연하여라. 새벽닭 울 때마다 당신 생각에 눈물 적시는, 여기 동방의 아침 햇살이 빛나는 나라. 당신의 참회와 그 눈물, 가을비에 묻혀 무딜 대로 무딘 우리 가슴에, 길이 촉촉이 뿌려주소서!

양견/ 산하(山下)목회연구소 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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